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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회원님의 새책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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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대륙신유가: 21세기 중국의 유학 담론』 (조경란·양차오밍·간춘송 엮음, 오현중·장윤정 외 2명 옮김, b(도서출판비), 2020.02)






대륙신유가가 누구인가를 말하기 전에 ‘대륙신유가’라는 책을 내가 왜 엮었고 번역하게 되었는가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2013년에 나는 『현대중국 지식인 지도』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을 쓰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불만족한 부분이 바로 신유가 파트였다. 비중은 조금 다르겠지만 중국의 신유가 또한 신좌파, 자유주의자와 함께 중국현대사상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어느 유파든 중국의 전체 사상계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설명할 수 있어야 그 특징을 잡아낼 수 있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었다. 이는 나의 취향이나 요행히 알게 된 지식의 우연성에서 벗어나 전체상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나의 ‘강박’과도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대륙신유가’라는 책의 번역 행위는 나의 학문 취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순수하게 ‘의무’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21세기 중국에서 갑자기 나타난 듯한 ‘대륙신유가’라는 학문집단은 누구인가. 이들의 핵심주장은 무엇이며 목표는 무엇인가. 중국공산당이 가지고 있는 장기적 전통기획과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그들을 알아야 하는가.

‘대륙신유가’라는 명칭은 한국의 독자들에는 조금 낯선 용어일 것이다. 사실 ‘대륙신유가’라는 개념은 아직은 학술용어로 정착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탄생된 배경과 범주를 둘러싼 대강의 ‘합의’가 이루어진 정도이다. 장칭(蔣慶)을 포함하여 캉샤오광(康曉光), 천밍(陳明), 정이(曾亦), 간춘송(干春松), 탕원밍(唐文明), 천비셩(陳壁生) 등이 대륙신유가의 핵심멤버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 장칭(蔣慶)이다. 그는 대륙신유가의 내용적 창시자라 할만하다. 대륙신유가 사이에서는 정신적 영수로 통한다. 대륙신유가라는 명칭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2005년이며 팡커리(方克立)에 의해서이다.

대륙신유가는 모두 장칭에게서 큰 영감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먼저 장칭이 무엇을 주장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집권정당인 중국공산당이 미래에 ‘통치의 정당성’을 가지려면 중국을 반드시 재유학화해야 한다.” 여기서 재유학화란 유학의 정치와 제도에 근거한 국가설계를 의미한다. 곧 정교합일의 유교국가 건설이다.



▲강유위 동상



장칭이 이러한 보수적 전통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위해 발견한 인물이 캉유웨이(康有爲)이다. 왜 캉유웨이인가. 미사여구 다 빼고 설명하면 청말 캉유웨이에게 최대 문제는 유교를 베이스로 한 청대 강역(疆域)의 유지였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지배의 정당성’을 가지려면 ‘대일통’을 구현해야 한다. “중국에서 ‘지배의 정당성’은 지배자의 민족적 출신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대일통’을 실현한 왕조야말로 ‘정통’의 중화왕조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있다.” ‘대일통’은 천하통일이며 이는 중국에서 안정을 의미한다. 대륙신유가에 의하면 캉유웨이가 군주제를 수호한 것도 어떻게 하면 ‘대일통’의 중화국을 위해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공산당도 결국 ‘대일통’의 강력한 통합성을 지닌 국가 이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캉유웨이의 목적의식과 상통한다고 보고 있다. 캉유웨이에게 공교는 19세기말 유교가 탈정치화된 상황에서 종교의 형식을 빌려 유교제도를 재건하려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나는 이것을 캉유웨이의 ‘문명모델’이라 부른다.

장칭의 이러한 ‘원대한 기획’이 나오게 된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1989년 5월 민주화운동이다. 당시 학생들의 민주화운동과 부정부패와 빈부격차의 수정 요구는 문화보수주의자들을 긴장시켰다. 중국은 1989년 천안문 6.4사태 이후 모든 것이 보수화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1980년대의 10년은 결과적으로 보면 ‘반동으로 가는 10년’이었던 셈이 된다. 이 10년은 보수주의의 1990년대를 잉태한 것이고 이후 30년은 그렇게 탄생한 보수를 발육시킨 시기라고 할 수 있다(80년대의 인문주의는 문화대혁명 직후라 성숙하지는 못했을지언정 그래도 건강성은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80년대의 재탐구를 통해 중국의 인문주의는 재출발할 필요가 있다). 장칭은 1989년 천안문사건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대륙의 유학부흥의 현실적 의의 및 그것이 직면한 문제」라는 장문의 글을 발표했다. 이는 문혁을 경험한 문화보수주의자로서 느낀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이 글은 대륙 유교사상사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대륙신유가 최초의 입장표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당시로서는 공산당의 주류이데올로기를 훨씬 능가하는 중국정치의 유학화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리저허우(李澤厚)는 장칭의 주장을 서태후보다 더 훨씬 보수적이라고 비판했다.



▲배를 타고 해외로 나가는 강유위



중국의 1990년대는 민족주의가 창궐한 시기였다. “중국 대륙은 이미 전반적으로 서구화되었고 중국성(中國性, chineseness)이 상실되었다.” “민족 생명은 그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다”, “민족정신을 철저히 상실했다.” 따라서 “오늘의 중국은 두 가지 큰 문제에 직면해 있다. 하나는 중국인 개인 생명이 귀의할 곳이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법 제도가 진공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장칭의 이러한 ‘국수주의적’ 언어는 마음붙일 곳 없는 사람들에게는 중독성 있는 메시지였다.

장칭은 큰 방향에서 중국의 미래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대신 대륙신유가들은 그가 제시하는 총론에 각론을 붙여주는 역할을 자임한다. 각론은 몇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대륙신유가는 문혁의 기원을 5.4 신문화운동에서 찾으려고 한다. 문혁은 신좌파를 제외하고는 부정적 상징으로 통하기에 신문화운동을 문혁과 연결시키는 즉시 신문화운동의 계몽기획의 정당성은 사라져버린다. 신문화운동의 급진적 계몽 기획을 철저히 청산하지 못한다면 문혁에 대한 성찰도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참고로 중국의 세 사상유파는 각각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르다. 대륙신유가는 앞에서 본 것처럼 5.4신문화운동과 중국의 사회주의 전통 즉 계몽서사와 혁명서사를 부정한다. 신좌파는 최근 입장이 모호해졌는데, 그 중 어떤 인물은 유가사회주의공화국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목록에서 5.4신문화운동을 배제하려는 것 같다. 자유주의자들은 공자의 전통문화, 5.4 신문화, 신중국의 사회주의 전통, 개혁개방 이후의 사회실천 등 이 네 종류의 전통이 현재 중국인의 의식을 주조하고 있다고 본다.

둘째, 대륙신유가에게 문명국가의 건설이라는 중책이 주어져 있다고 본다. 정치국가로서의 중국의 기본틀은 이미 확립되었지만 문명국가의 건국과정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다. 5.4신문화운동 시기보다 청말학술로 올라가 거기서 여러 가능성을 찾으려고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캉유웨이에 주목하는 것도 그가 서양과의 대면과정에서 경학사상과 정교이론에 대응하려 했으며 경학, 공교론과 군주제의 재건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대륙신유가에게 문명국가의 건설은 청말의 학술의 재발견을 통해 좌우논쟁을 뛰어넘는 문화보수주의의 길을 열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경학을 중심으로 중국의 이론체계를 재건하여 중국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문명체로서의 중국을 완성하는 것이 대륙신유가에게 주어진 중요한 소명이다.

셋째, 대륙신유가는 계몽서사와 혁명서사로는 이제 더이상 중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 유교가 대신 들어가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이 두 서사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의미한다. 이는 곧 서구사상의 배척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서양의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서양이라는 강대한 곳에서 발원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서양과 힘이 비슷해진 상황에서 서양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을 자신을 이적화(夷狄化)하는 것이다.” 그들의 상상력은 신좌파나 자유주의자들에 비하면 매우 제한적이다. 특히 콜로니얼리즘과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모더니티와 포스트 모더니티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아니 관심 자체가 없다. 동서의 복잡한 역사를 단순화해서 강약의 문제로만 인식한 결과이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유교문화를 베이스로 한, 또는 유교로 교화된 인민들로 구성된 중화제국, 청대의 강역을 유지하는 부강한 국가인 중화제국으로의 복귀에 있어 보인다. 이러한 과도한 주장에 대해 거자오광(葛兆光)은 대륙신유가를 향해 “중국의 대륙신유학은 ‘혼이 신체에서 떠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시신에 혼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고 일갈한다. 중국정부 또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성도(成都)에서 출판되는 대륙신유가 잡지 천부신론(天府新論)이 반년동안 정간당했다. 1990년대 『전략과 관리』라는 잡지도 과도한 민족주의 표출로 정간당한 적이 있다.

대륙신유가를 우리가 왜 알아야 하는가. 그들과 대화와 소통이 가능한가를 알기 위해서다. 내가 최근 몇 년간 대륙신유가 중 핵심멤버와 인터뷰도 해보고 번역작업을 통해 그들의 전반적 구상을 들여다본 경험에 의하면 –물론 작은 경험이지만- 신좌파나 자유주의자들에 비하면 그들의 상상력에서 가장 결핍된 지점은 근대성과 탈근대성에 대한 인식이다. 이는 그들 자체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기보다 신좌파와 자유주의자에 대한 심리적 반발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즉 그들은 중국전통에 대해 ‘점유자의 태도’를 견지한다. 이러한 태도가 그들을 중국을 대상화시킬 수 없게 만들고 거리두기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같다. 대륙신유가의 현재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그들과 대화가 가능할까를 생각해본다. 문명권의 단위로 세계를 본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앞으로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지도 모른다. 유교라는 문명의 모습이 ‘민족주의적 유교’라는 형용모순의 형태로 ‘전유’되는 것은 아닌가. 문명의 로칼리티화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중국현대사상





2019년 중국 북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원 초빙교수를 지냈고, 절강대학 인문고등연구원 방문학자를 역임했다. 저서로 『현대중국 지식인지도-신유가, 자유주의, 신좌파』, 글항아리, 2013(문광부 우수도서)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 책세상, 2015(2016년도 세종 우수도서) 『국가, 유학, 지식인-현대중국의 보수주의와 민족주의』, 책세상, 2016(대한민국학술원 우수도서) 등이 있다.






출처 : 대학지성 In&Out(http://www.unipress.co.kr)
 첨부파일
조경란_교수님_출처_대학지성인앤아웃.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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